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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프랑스 신고전주의 미술

by 뤼딩 2023. 6. 15.

프랑스 신고전주의 미술의 배경

이성과 논리를 중요시했던 18세기의 계몽주의가 확대되고 구체제에 맞서서 혁명을 일으키려는 분위가 사회 전반에 깔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맞춰서 이 시기에는 역사적인 사건이나 영웅을 찬양하는 역사화가 많이 그려지게 되었다. 계몽주의자들은 프랑스 귀족 문화의 사치를 혐오하였으며 신념과 도덕을 지키는 것을 큰 명예로 여겼다. 그렇기에 합리와 이성에 바탕을 두고 있고 비례와 균형을 중요시하는 고전 미술이 자신들의 신념을 표현하는 적합한 양식으로 여겼다. 1738년에 폼페이가 발굴된 것도 당대에 고전 양식의 붐을 일으킨 계기가 되었다. 고대의 회화는 건축이나 조각에 비해 보존되어 있는 것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었는데 폼페이의 발굴로 인하여 고대 회화를 세상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유럽은 고고학적인 열기에 휩싸이게 되었다. 사람들은 센 강에서 목욕을 감행하거나 회화에서 본 튜닉을 입고 다니기도 하였다.

 

자크-루이 다비드

19세기 초 신고전주의 미술을 하나의 사조로 완전히 정착시킨 사람은 프랑스의 자크-루이 다비드(1748-1825)이다. 그는 26살에 로마상을 수상하였고 1781년에 <구걸하는 발리자리우스>를 살롱에 출품하여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그는 로마에서 거주하면서 고대의 조각들을 직접 보고 연구하였고 르네상스와 바르크 시대의 작품들을 모사하고 복제하며 실력을 연마하였다. 다비드의 작업 경향은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에 변화했다. 1780년대에는 애국심을 고취하는 역사화를 그렸다. 1790년대는 나폴레옹의 화가로 활동하였다. 1815년 왕정이 복고된 이후에는 벨기에로 망명하여 생애 마지막을 그곳에서 지내며 그림을 그렸다. 다비드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는 <호라티우스의 맹세>(1784)이다. 이는 다비드의 초기 작품 중 하나인데 혁명 전 사회 전반에 깔려 있던 애국심이 잘 묻어나는 작품이다. '호라티우스'는 17세기 프랑스에서 저술된 비극이다. 로마 건국의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데 두 가문, 로마와 알바 사이에 일어난 일에 관한 작품이다. 로마와 알바는 긴 전쟁 끝에 각 도시를 대표하는 전사 3명을 내어 승부를 가리기로 했다. 로마에서는 호라티우스 형제들이, 알바에서는 퀴리아스 형제들이 선택되었다. 두 가문은 서로 사돈 관계였다. 다비드는 비극 원작에는 없는 장면을 창안하여 그림을 그렸다. 바로 호라티우스 형제 세 명이 아버지 앞에서 승리에 대한 다짐을 약속하는 장면이다. 목숨을 걸고 싸우러 나가기 직전의 장면을 담은 이 그림은 자기희생의 고결함을 강조한다. 개인의 안위 보다 국가의 승리를 더 고귀한 것으로 취급하는 당대의 사회 분위기가 잘 반영된 주제이다. 다비드는 1789년까지 도덕적인 영웅을 찬양하고 시민 덕목을 강조하는 그림들을 연이어 그렸다.

다비드는 자코뱅파 중 가장 급진적인 인물이었던 로베스 피에르의 친구였고 루이 16세를 단두대에 세우는 것에도 찬성하였던 사람이다. 이런 그는 혁명의 지도자들의 그림을 남기기도 하였다. 걸작 중 하나는 마라를 그린 <마라의 죽음>(1793)이 있다. 마라는 다비드의 친구였으며 혁명의 지도자였다. 그는 피부병을 앓고 있어서 늘 욕조에서 집무를 보았는데 욕조 안에서 반혁명 분자인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살해되었다. 욕조 안에서 무방비 상태로 살해당한 마라를 그린 이 작품은 처참한 순간을 순교의 장면으로 변모시켜 놓았다. 다비드는 집무 테이블에 'À MARAT'라는 글씨를 적어서 마치 비석처럼 보이게 했다. 마라 머리에 쓰고 있는 터번은 후광처럼 빛을 받고 있다.

로베스 피에르가 죽은 뒤에 다비드는 감옥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변화한 정치적인 상황에 적응하여 나폴레옹의 전담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다비들의 걸작 중 하나는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1804)이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되고 있는 나폴레옹의 대관식 장면을 그린 이 그림은 길이가 1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파노라마이다. 황제의 취향에 맞도록 매우 화려하고 장엄하게 그려졌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인물들이 매우 생생하다. 그림 속 나폴레옹은 황후에게 관을 수여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대관식에서는 관은 교황이 황제에게 씌워주곤 하였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스스로 관을 쓰고 그다음에 황후에게도 관을 씌워주었다. 교황 피오 7세는 그의 뒤에서 입회만 하고 있다.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의 초상화 <베르나르 산을 넘는 나폴레옹>(1800-1801)의 왼편 하단을 보면 바위 위에 샤를마뉴, 한나발이라고 적어놓았다. 이는 나폴레옹을 유럽을 통합하였던 역사 속의 영웅들과 동일시한 것이다. 이렇게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궁정 화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였다.

다비드의 <텔레마코스와 유카리스의 작별>(1818)은 그의 말년 벨기에서의 망명 중에 그린 것이다. 이전보다 윤곽선과 형태의 표현이 분명해지고 색채의 대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 시기 작업들의 특징이다.

 

 

*참고문헌

E. H. 곰브리치, 백승길, 이종승 역, 서양미술사, 예경, 1997

H. W. 젠슨, 김윤수 외 역, 미술의 역사, 삼성출판사, 1978

캐롤 스트릭랜드, 김호경 역, 클릭 서양미술사 동굴벽화에서 비디오아트까지, 예경, 2006

이은기, 김미정, 서양미술사, 미진사, 2008

 

 

Jacques-Louis David, The Farewell of Telemachus and Eucharis, 1818, Oil on canvas, Terms of Use: Open Content, Credit Line: The J. Paul Getty Museum, Los Ange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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