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사실주의 미술에 대하여
사실주의는 미술사의 흐름 내에서 반족적으로 등장한 주제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원근법이 터득되어 예술가들은 자연을 사진처럼 그려낼 수 있는 기술을 갖게 되었다. 이후 16세기 플랑드르의 미술은 사물과 공간의 세부 묘사를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그려내었다.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19세기 이전의 그림들은 사실주의적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해도 주제를 이상화하거나 변형을 가함으로써 일정의 수정을 가한 것들이었다. 반면 19세기의 화가들은 시각적으로 인지한 것을 그림에 모방했다고 말할 수 있다. 19세기의 예술사조로서의 사실주의는 낭만주의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미술의 양식을 지칭한다. 19세기 중반에 자본주의의 흐름이 강해지고 사회 내 불평등이 심해지면서 사실주의 미술이 등장하게 되었다. 신고전주의 미술은 고전을 답습하는 시대착오적인 미술로 치부되었고 낭만주의 미술은 사회의 현실에 도피하는 미술로 치부되면서 사실주의 미술이 고개를 들었다. 19세기의 사실주의 화가들은 그 당시에 일어난 사건들만을 그림의 주제로 삼았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신과 여신은 그들의 논의 밖의 것들이었다. 대신 도시의 노동자 계층과 같은 소재를 그림에 그렸다.
프랑스 사실주의의 아버지 - 귀스타브 쿠르베에 대하여
사실주의 운동을 이끈 사람은 귀스타브 쿠르베(1819-1877)이다. 그는 실용주의를 신봉하였고 회화는 실제로 있는 사물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천사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자, "나는 천사를 본 적이 없으며 나에게 천사를 보여준다면 그려 보겠다"라고 대답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그는 자신의 망막에 비친 것만 그릴 것이고 망막에 비치지 않는 것은 그리지 않는 것을 신조로 삼았다. 그의 단연 대표작은 <오르낭의 매장>(1849-1850)이다. 그는 1849년에 열릴 예정이었던 살롱에 출품하기 위해 이 그림을 만들었다. 그의 고향 사람들을 모델로 하고 있으며 가로 7미터에 가까운 크기의 대작이다. 오르낭 마을의 장례식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사제들, 마을 사람들, 그의 누이들, 평범한 동네 사람들이 그림에 등장한다. 전체적으로 황량하고 잿빛의 색깔로 그려져 있는데 많은 비평가들이 이 그림을 절망적일 정도로 비천하다고 평했다. 집단 초상화와 장례식이라는 종교 주체를 혼합한 듯한 이 그림은 전통적인 구도 없이 인물들이 죽 늘어서있기만 하다. 나이프로 평평하게 밀어서 그린 것인데, 어두컴컴한 얼굴들이 떠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누가 주인공인지, 어디에 중점을 둔 것인지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옆으로 길게 늘어진 이 캔버스 앞에서 서서 그림을 관람한다면, 관람객은 그 앞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인물들을 보게 될 것이다. 쿠르베의 의도는 어떠한 특별한 사건과 의미를 담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을 단순히 그려 넣는 것에 있었을 것이다. 누구의 장례식을 그린 것인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할아버지, 또는 여동생, 또는 한 지방유지의 장례식이었다는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쿠르베가 명확히 드러낸 바 없다. 이 또한 쿠르베가 한 개인을 이상화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1849년의 살롱은 당시 정치적인 상황에 의해 연기되었다. <오르낭의 매장>은 1850-1851년 부르주아 체제 속에서 열렸던 살롱에 출품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이 부르주아지를 매장하자는 함의가 있다고 분개하였다. 쿠르베는 원근감, 미화된 색상과 매끄러운 표면 등을 거부하고 현실 그 자체를 그림에 담으려고 한 것뿐이다. 그는 당대의 현실이 그림에 담겨야 할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미화된 현실이 아닌 있는 그대로를 재현하고 부르주아들의 허위의식을 풍자하는 그의 작품은 19세기 사실주의 미술의 전형을 보여준다.
사회풍자화를 그린 오노레 도미에에 대하여
오노레 도미에(1808-1879)는 신문, 잡지와 같은 매체물에 사회풍자화를 그렸다. 도미에는 석판화를 이용하여 작업하였는데 그의 삽화와 판화는 '라 카리카튀르'와 같은 당시의 신문과 잡지에 실렸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정치적인 메시지를 분명하게 했던 저널리스트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귀족과 정치인들이 으스대는 모습을 풍자한 캐리커처를 주로 그렸다. 뿐만 아니라 제2공화국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을 점토로 빚은 캐리커쳐상을 만들기도 하였다. 루이 필립은 1830년 혁명으로 권력을 잡았는데 그의 부패, 불평등, 억압적인 노동자 정책을 고발하다가 도미에는 감옥에 가기도 하였다. <트랑스노냉 가의 학살, 1834년 4월 15일>(1834)을 이 시기에 그가 그린 석판화이다. 도미에는 트랑스노냉 가에서 발생한 과잉진압의 한 장면을 이 작품에 담았다.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데 그의 아래에는 아이가 깔려있다. 기록성이 강한 이 작품에는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상화가 전혀 없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 중 하나는 <삼등열차>(1860-1863)이다. 그가 존경하는 렘브란트의 영향을 받아 그린 유화작품이지만 윤곽선을 강조하고 있고 제한된 색채를 사용한 점에서 삽화와 비슷한 느낌을 풍긴다. 근대화로 인해 도시는 발달하고 농촌은 황폐해지고 있는 가운데 계층 간의 격차는 심화되고 있는 사회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비좁고 매우 열악한 삼등열차에 사람들이 가득 앉아있다. 이 그림은 현대의 교통수단 속에서 사람들이 서로에게 무관심한 채 앉은 장면을 담은 최초의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E. H. 곰브리치, 백승길, 이종승 역, 서양미술사, 예경, 1997
H. W. 젠슨, 김윤수 외 역, 미술의 역사, 삼성출판사, 1978
캐롤 스트릭랜드, 김호경 역, 클릭 서양미술사 동굴벽화에서 비디오아트까지, 예경, 2006
이은기, 김미정, 서양미술사, 미진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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